나는 ‘곤조’가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옳은 방식이건 그렇지 못한 방식이건, 자신만의 굳건한 철학이 있는 사람을 굉장히 높게 평가한다. 스티브 잡스가 그렇다. 진정한 의미의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 개인용 컴퓨터의 대중화를 이끌었다는 평가, 제품에서의 디자인을 ‘보이는 것’이 아닌 ‘기능’으로써 정의했다는 평가 등 그를 논하는 의견은 굉장히 많지만 나는 단순히 잡스의 곤조 하나때문에 그에게 빠져들었다. 역설적으로 그런 곤조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지만, ‘단순함’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잡스의 철학이 지금 나의 삶과 살아가는 방식에도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번 STEAL THE APPLE 전시는 나처럼 스티브 잡스를 좋아하거나, 애플 제품을 굉장히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했다. 평소에도 애플 신제품 발표회가 있는 날이면 새벽 2시에도 애플 이벤트를 꼬박꼬박 챙겨보는 우리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 전시는 10월 17일까지 진행되며, 음료나 기타 사은품 없이 전시만 보기위한 입장권은 10,000원이다. 함께 간 친구들은 예매할때 2천원을 더 내고 1층에서 밀크티를 먹었다. 음료 혹은 에어팟 프로 케이스가 함께 주어지는 티켓은 각각 12,000원 그리고 36,000원.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까지는 입장권 없이도 관람할 수 있는 오픈된 공간이고, 유료 입장권이 필요한 메인 전시관은 5층에 위치해있지만 코로나 사회적 거리두기때문에 1층 입구에서 미리 대기번호를 받고 카카오톡으로 입장 안내를 기다려야한다. 우리 앞에 약 17명 정도가 대기하고있어서, 지하 1층부터 쭉 올라오며 전시를 봤다.
사실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까지 오픈된 전시장에는 별로 볼만한 콘텐츠가 없었다. 그냥 사진찍고 돌아다니면서 놀았더니 금새 우리팀 차례가 돼서 5층 전시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전시장에는 도슨트님이 있어서 전시장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안내를 해주신다. 주로 애플 컴퓨터의 변천사부터 각 제품들의 특징과 관련된 스토리, 그리고 잡스의 철학에 대해 설명해주신다. 아래 사진부터는 5층 메인 전시장에서 찍은 사진들.
이 귀하디 귀한 기계들이 어디 보호용 케이스 안에 들어있는것도 아니고, 직접 타건까지 가능하도록 모두 오픈되어있다. 아래 따로 사진으로 첨부하겠지만, 심지어 어떤 컴퓨터들은 아직까지 동작하기도 한다. 나와 내 친구들은 장난감 가게에 놀러간 어린이마냥 흥분해서 신나게 컴퓨터를 만졌다.
일본어 타이핑이 가능한 Apple 2 J Plus 컴퓨터와, 일부 유럽 국가들에서 사용하는 특수 알파벳 기능이 추가된 Apple 2 E 컴퓨터. 저 베이지 색상의 컴퓨터는 마치 내가 어렸을때 초등학교 컴퓨터실에서 보던 윈도우 98 컴퓨터 본체의 색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부터 키보드 외에 추가적인 입력장치로 마우스가 등장했다. 물론 직접 클릭도 해볼 수 있다. 궁금해서 아래를 뒤집어보니 볼마우스. 같이 간 세명이 사실 모두 친구는 아니고 한 명은 동생, 한 명은 형인데 동생이 자기는 볼마우스가 뭔지 모른다더라. 아니 나랑 한살차인데…? 아무튼 정말 오랜만에 본 볼마우스는 정말 반갑더라.
직접 타이핑하고 Text To Speech(TTS) 시연까지 가능한 매킨토시도 있었지만, 그 컴퓨터는 대기줄이 너무 길어서 그냥 남들 하는거좀 뒤에서 보다가 패스. 사실 그 매킨토시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잡스의 전설적인 프레젠테이션 중 하나로 그 매킨토시를 발표할때 매킨토시에 관한 스토리를 말하려는데 그 이야기를 잡스가 직접 말로 하는게 아닌, 매킨토시에 미리 타이핑해둔 문장을 매킨토시가 읽는 방식으로 진행을 했다는 것이다. 80년대에 그런 기능을 벌써 구현했으니, 당연히 현장에서는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고. 그 옛날에 컴퓨터가 타이핑한대로 말을 했으니 그럴만도 하다.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이야기를 하니 떠오르는 발표가 또 하나 있는데, 바로 2008년 맥월드 맥북 에어 발표이다. 종이 몇장이나 들어갈법한 작은 서류봉투에서 갑자기 노트북을 꺼내는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이 정말 압권이었는데, 아래 유튜브 링크로 설명을 대신하겠다. 10분짜리 영상인데 주요 부분만 빨리 보고싶다면 2분 24초부터 봐도 상관은 없다. 3분 25초가 그 유명한 서류 봉투에서 맥북 에어를 꺼내는 장면.
첫 번째 사진의 파워맥 G4 큐브는 뉴욕에서 인턴 생활을 할 때 MoMA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박물관에 전시될정도로 아름다운 디자인의 컴퓨터. 하지만 저 맥의 문제는 디자인에 극도로 치중한 나머지 내부에 팬이 없어서 열 방출이 제대로 되지 못해 컴퓨터로써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게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모든게 용서되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유려한 디자인이다.
아이맥 G3(첫 번째 사진). 컴퓨터 디자인 뿐만 아니라 산업디자인 전반에 걸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바로 그 전설적인 디자인. 그도 그럴것이 이전까지의 디자인은 위에서 언급했듯, 대부분 베이지색의 상자같은 디자인이었다. 그런 컴퓨터를 저런 개성있는 색상과 함께, 심지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디자인 할 생각을 하다니. 사실 이 디자인은 조니 아이브가 애플에서 이미 과거에 완성했던 디자인이지만, 당시 잡스가 없는 애플의 경영진들은 저런 디자인의 컴퓨터를 출시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애플에서 쫒겨났던 잡스가 다시 애플로 복귀하면서, 저 보석같은 디자인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사진은 iBook G3 클램쉘 모델.
여기는 5층 전시장은 아니고 4층의 전시장인데, 잡스가 애플에서 쫒겨난 후 설립한 NeXT 사의 컴퓨터들과 잡스가 인수했던 픽사의 피규어들이 한 자리에 함께 모여있었다. 애니메이션을 보는것도 아니고 NeXT 컴퓨터에 관심이 있는것도 아니었지만, 이 둘이 한 자리에 모여있는 모습은 정말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자신이 만들었던 회사에서 쫒겨나고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사재까지 털어가며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위해 모두를 쏟아부었던 스티브 잡스. 위 사진들 외에도 비교적 최근의 맥과 아이맥까지 모든 애플 컴퓨터 제품군이 있었지만, 최근의 알루미늄 마감 맥과 아이맥은 너무 익숙하고 친근한 디자인이라 따로 사진을 찍지는 않았다.
규모가 큰 전시회는 아니어도 이렇게 다양한 애플 컴퓨터들을 가까이서 보며 직접 시연까지 해볼 수 있는 전시가 고작 10,000원밖에 하지 않는다는건 정말 땡큐인 부분이다. 거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설명해주시는 도슨트님까지. 개인적으로 도슨트님의 설명을 들을때는 이 분이 그냥 돈을 받고 하는게 아닌, 정말 애플 제품을 사랑하고 애플 제품들의 의미를 전달하고싶은 마음이 크다는게 느껴져서 너무 좋았었다. 혹시 이번 STEAL THE APPLE 전시에 가게된다면,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꼭 도슨트님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를 관람하는걸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