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라 위스키를 처음 접했을 때의 그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분명 위스키인데, 한 모금 머금는 순간 바닷가 모닥불 옆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 첫 경험이 바로 라가불린이었다. 처음에는 솔직히 “이게 맞아?” 싶었는데, 두세 모금 지나니까 이 묘한 스모키함에 빠져들더라. 그 이후로 아일라 위스키, 그 중에서도 라가불린을 꽤 자주 찾게 됐다.
라가불린 증류소, 어떤 곳인가
라가불린(Lagavulin)은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 남쪽 해안에 자리잡은 증류소다. 이름부터가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방앗간이 있는 골짜기”라는 뜻인데, 실제로 가보면 작은 만(bay) 안에 아늑하게 들어앉아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증류소 바로 앞에는 13세기에 지어진 더니베그 성(Dunyvaig Castle)의 폐허가 보이는데, 이 풍경이 위스키 한 잔의 낭만을 제대로 완성해주는 느낌이다.
공식적인 설립 연도는 1816년. 존 존스턴(John Johnston)이 정식 면허를 받아 세운 건데, 사실 이 자리에서는 1742년부터 밀주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때 10개가 넘는 불법 증류기가 돌아갔다고 하니, 이 동네 사람들의 위스키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간다.
라가불린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 피터 매키(Peter Mackie)다. 1878년에 증류소를 인수한 후 유명한 화이트 호스(White Horse) 블렌디드 위스키를 만들었는데, 라가불린이 그 핵심 원액이었다. 재미있는 건 매키가 바로 옆에 있는 라프로익 증류소의 판매권을 잃고 나서, 라프로익을 똑같이 따라 만들겠다고 증류소 안에 몰트밀(Malt Mill)이라는 복제 증류소를 지었다는 것. 근데 결과는? “라프로익도 안 되고, 라가불린도 안 되는” 애매한 물건이 나왔다고 한다. 위스키의 세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
아일라의 귀족
라가불린이 다른 아일라 증류소들과 차별화되는 가장 큰 이유는 증류 속도다. 아일라에서 가장 느리게 증류하는 곳으로, 1차 증류에 5시간 이상, 2차 증류에는 무려 9시간 이상이 걸린다. 옆 동네 아드벡이나 라프로익이 훨씬 빠르게 돌리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느린 증류 과정이 강한 피트 향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고 라운드한 질감을 만들어내는 비결이라고.
그래서 붙은 별명이 “아일라의 귀족(The Aristocrat of Islays)”. 아드벡이 강렬함, 라프로익이 약품 같은 날카로움이라면, 라가불린은 그 피트의 힘을 셰리 캐스크의 단맛으로 감싸서 우아하게 마무리하는 스타일이다.
참고로 라가불린은 생산량의 98%를 싱글 몰트로 출시한다. 디아지오(Diageo) 소속 증류소 중에서 이 비율은 상당히 이례적인데, 그만큼 싱글 몰트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곳이다.
라가불린 대표 라인업
라가불린의 정규 라인업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라가불린 8년 — 원래 2016년 증류소 200주년 기념 한정판이었는데, 반응이 좋아서 정규 라인업에 편입됐다. 48%로 도수가 살짝 높고, 버번 캐스크만 사용해서 16년 대비 피트가 더 생생하고 시트러스 느낌이 있다. 라가불린 입문용으로 추천할 만하다.
라가불린 16년 — 이 집의 간판이자, 클래식 몰트 오브 스코틀랜드(Classic Malts of Scotland) 6종 중 하나로 선정된 대표작. 43%에 리필 유러피안 오크 캐스크 숙성. 자세한 테이스팅은 아래에서.
라가불린 디스틸러스 에디션(Distillers Edition) — 16년 숙성 후 페드로 히메네스(PX) 셰리 캐스크에서 추가 숙성을 거친 에디션. 매년 빈티지를 달리해서 출시된다. 16년보다 건과일의 달콤함이 한층 더해진 느낌인데, 셰리 영향을 좋아한다면 이쪽이 더 맞을 수 있다.
라가불린 12년 캐스크 스트렝스 — 디아지오에서 매년 한정 수량으로 내놓는 스페셜 릴리즈. 캐스크 스트렝스(보통 56~57%)로 병입하기 때문에 가장 원초적이고 강렬한 라가불린을 경험할 수 있다. 리필 아메리칸 오크 숙성이라 셰리의 영향은 적고, 피트와 보리의 캐릭터가 직빵으로 온다.
이 외에도 배우 닉 오퍼만(Nick Offerman)과 협업한 오퍼만 에디션이 있다. 미드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Parks and Recreation)’에서 론 스완슨 역을 맡은 배우인데, 극 중에서도 라가불린을 마시는 장면이 나올 정도로 실제 라가불린 팬이라고. 이 협업 시리즈는 기네스 캐스크 피니시, 럼 캐스크 피니시 등 다양한 변형이 나왔다.
라가불린 16년 테이스팅 노트
드디어 본론. 라가불린의 얼굴이자 아일라 싱글 몰트의 교과서라 불리는 16년산.

향 (Nose)
글라스에 따르자마자 피트 스모크가 확 올라온다. 근데 그냥 연기 냄새가 아니라, 담배 가게에 들어갔을 때 나는 그 묵직한 향 같은 느낌이다. 거기에 바다 냄새가 섞여있다. 요오드, 해초, 소금기 — 마치 해안가 바위 위에 서 있는 듯한 향. 조금 기다리면 그 밑에서 셰리 캐스크에서 온 건과일 단맛이 올라오는데, 바닐라랑 말린 과일 향이 스모크 사이로 은근하게 얼굴을 내민다. 랩상 수숑 차를 떠올리게 하는 훈연향도 느껴진다.
맛 (Palate)
첫 모금에서 요오드와 소금기가 먼저 치고 들어온다. 직후에 훈제 생선 같은 풍미가 퍼지면서, 대추, 무화과 같은 건과일의 달콤함이 따라온다. 입 안의 질감이 오일리하면서 부드러운데, 이게 느린 증류의 결과라고 한다. 캐러멜, 오렌지, 다크 프루트의 단맛이 의외로 풍성하게 느껴지고, 뒤쪽에서는 소금과 후추의 스파이시한 맛이 입 안을 채운다. 오래된 가죽 같은 뉘앙스도 살짝 있고.
16년이라는 숙성 기간이 피트의 거친 면을 많이 다듬어 놓은 느낌이다. 8년산을 마셔보면 같은 증류소 제품이라도 확실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는데, 16년은 모든 요소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달까.
피니시 (Finish)
피니시가 정말 길다. 따뜻한 여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후추의 스파이시한 맛이 남고, 그 위에 무화과와 흑설탕 같은 달콤함이 겹겹이 쌓인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질감이 인상적이고, 피트 스모크가 삼킨 후에도 수 분간 입 안에 머문다. 이 긴 피니시가 라가불린 16년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마치며
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라가불린 16년은 한 번쯤은 꼭 마셔봐야 할 병이라고 생각한다. 피티한 아일라 위스키가 처음이라 부담스럽다면 8년산부터 시작하는 것도 괜찮고, 이미 아일라에 익숙하다면 16년의 그 깊고 복합적인 맛에 상당히 만족할 거다.
음용 방식은 개인적으로 니트(Neat)를 선호하지만, 물 몇 방울을 떨어뜨리면 숨어있던 단맛이 더 잘 올라오기도 한다. 얼음은… 글쎄, 라가불린 16년에 얼음을 넣는 건 좀 아까운 느낌이 있어서 왠만하면 니트나 물 몇 방울 정도를 추천한다.
한 가지 팁이라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마실 것. 글라스에 따르고 처음 10분, 20분이 지나면서 향이 계속 변한다. 피트 뒤에 숨어있던 셰리의 달콤함이 점점 고개를 드는 그 과정 자체가 라가불린을 마시는 재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