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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 크릭 9년 리뷰 — 짐 빔이 만든 프리프로히비션 스타일 버번

Spemer Spemer · 수정 · 5 mins read
납 크릭 9년 리뷰 — 짐 빔이 만든 프리프로히비션 스타일 버번

버번 위스키를 좀 마셔보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짐 빔 말고 좀 더 괜찮은 거 없나” 하는 시점이 온다. 그때 딱 만나게 되는 병이 납 크릭(Knob Creek)이다. 사실 납 크릭도 짐 빔 증류소에서 만드는 건데, 같은 증류소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급이 다르다. 9년 숙성에 100 프루프. 이 숫자만 봐도 짐 빔 화이트 라벨과는 지향점 자체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납 크릭은 어떤 위스키인가

납 크릭은 1992년에 짐 빔의 6대 마스터 디스틸러 부커 노(Booker Noe)가 만든 “스몰 배치 컬렉션”의 일원으로 세상에 나왔다. 부커스(Booker’s), 베이커스(Baker’s), 바실 헤이든(Basil Hayden’s)과 함께 출시된 프리미엄 라인업인데, 부커 노가 이 네 병을 기획한 의도는 명확했다. 금주법(프로히비션) 이전 시대의 풍성하고 묵직한 버번을 되살리겠다는 것.

납 크릭이라는 이름은 에이브러햄 링컨이 어린 시절 살았던 켄터키주 납 크릭 농장(Knob Creek Farm)에서 따왔다. 9년 숙성에 100 프루프(50% ABV)라는 스펙은 금주법 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보틀드 인 본드(Bottled-in-Bond) 기준을 의식한 거다. 미국 버번 법정 최소 기준이 2년 숙성에 80 프루프인 걸 생각하면, 납 크릭이 얼마나 높은 기준을 잡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매시빌은 옥수수 77%, 호밀 13%, 몰트 보리 10%로 짐 빔의 기본 레시피와 동일하다. 같은 원액인데 숙성 기간과 병입 도수에서 차별화를 둔 셈. 배럴 엔트리 프루프는 125 프루프(62.5%)로 업계 표준 상한에 맞추고 있고, 숙성에 쓰는 배럴은 레벨 4 차링(가장 강한 수준)을 거친 새 아메리칸 화이트 오크다. 레벨 4 차링이면 나무 안쪽이 거의 악어 가죽처럼 갈라질 정도로 깊게 태운 건데, 여기서 캐러멜과 스모키한 뉘앙스가 나온다.

납 크릭 9년 버번 위스키

재밌는 건 배럴 보관 위치다. 짐 빔 숙성 창고에서 납 크릭용 배럴은 항상 중간 층에 배치한다. 위층도 아래층도 아닌 중간. 위층은 온도 변화가 크고 아래층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데, 중간 층이 둘 사이의 균형점이 되면서 9년이라는 긴 숙성 동안 과도한 오크 추출 없이 안정적으로 풍미가 발달하는 거다. 와일드 터키가 낮은 배럴 엔트리 프루프로 차별화를 두는 것처럼, 납 크릭은 배럴 위치로 자기만의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납 크릭 대표 라인업

납 크릭 라인업은 짐 빔 스몰 배치 컬렉션 안에서 꽤 넓게 펼쳐져 있다.

  • 납 크릭 9년 — 100 프루프, 오늘의 주인공
  • 납 크릭 싱글배럴 리저브 — 120 프루프(60%), 싱글배럴
  • 납 크릭 12년 — 100 프루프, 9년 대비 오크 깊이 강화
  • 납 크릭 라이 — 7년 숙성 라이 위스키, 100 프루프

납 크릭 9년 테이스팅 노트

100 프루프(50% ABV). 와일드 터키 101과 거의 같은 도수대인데, 풍미의 방향은 확연히 다르다.

향 (Nose)

글라스에 따르면 먼저 바닐라의 진한 달콤함이 코를 감싼다. 버번의 기본기 같은 노트인데, 납 크릭의 바닐라는 좀 더 묵직하고 진하다. 그 위로 구운 과일 — 오븐에 구운 사과나 배 같은 달콤하고 캐러멜화된 과일향이 얹히면서 단순한 바닐라 이상의 깊이가 생긴다. 오크의 존재감이 상당한데, 9년 숙성에 레벨 4 차링이 만들어내는 토스티하고 그을린 뉘앙스가 전체를 받쳐주고 있다. 시나몬과 넛맥의 베이킹 스파이스가 중간층에 깔리고, 그 사이로 아몬드와 호두 같은 견과류의 고소한 향이 스며든다. 전체적으로 묵직한 인상. 러셀 리저브 싱글배럴이 오크와 캐러멜의 세련된 조합이라면, 납 크릭은 좀 더 투박하고 무게감 있는 달콤함이다. 코를 대고 한참 맡고 있으면 숨어있던 피넛의 고소한 뉘앙스도 잡히는데, 짐 빔 계열에서 종종 느낄 수 있는 시그니처 같은 노트다.

맛 (Palate)

첫 모금에서 흑설탕의 진하고 묵직한 단맛이 혀를 덮는다. 캐러멜보다 한층 깊고 어두운 톤의 달콤함인데, 이게 납 크릭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바디감이 100 프루프답게 꽉 차있어서, 입 안을 묵직하게 채우면서 오일리한 질감이 느껴진다. 달콤함이 한 박자 지나면 검은 후추와 생강의 스파이시한 킥이 치고 올라오는데, 이 단맛과 매콤함의 줄다리기가 꽤 재밌다.

잭 다니엘 싱글배럴이 차콜 멜로잉으로 매끈한 질감을 만든다면, 납 크릭은 그런 여과 과정 없이 원액의 질감을 그대로 담고 있어서 좀 더 솔직한 텍스처다. 중반부에서 체리 같은 과일 뉘앙스가 살짝 고개를 내밀고, 전체적으로 달콤하면서도 스파이시한 구조가 끝까지 유지된다. 물을 조금 넣으면 숨어있던 바닐라와 견과류의 고소함이 열리면서 스파이스가 한 발 물러나는데, 이 상태도 꽤 좋다.

피니시 (Finish)

피니시에서 오크의 여운이 먼저 자리를 잡는다. 차드 오크의 탄닌감이 입 안에 깔리면서, 그 위로 바닐라의 달콤한 잔향이 은은하게 이어진다. 인상적인 건 마무리가 생각보다 부드럽다는 점이다. 100 프루프라서 강렬한 피니시를 예상했는데, 삼키고 나면 따뜻한 온기가 가슴 쪽으로 천천히 퍼지면서 거칠지 않게 정리된다. 와일드 터키 레어 브리드가 스파이스로 밀어붙이는 강렬한 피니시라면, 납 크릭은 오크와 바닐라가 부드럽게 감싸면서 마무리하는 타입이다. 긴 여운은 아니지만 깔끔하고 편안한 끝맛이라, 자연스럽게 다음 모금으로 손이 간다.

납 크릭 9년에 어울리는 안주

  • 바비큐 립 — 프리프로히비션 스타일의 묵직한 풍미가 바비큐의 스모키한 달콤함과 매칭
  • 피칸, 아몬드 등 견과류 — 납 크릭의 피넛 노트와 견과류의 고소함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마치며

납 크릭 9년은 “가격 대비 숙성 연수가 이게 말이 돼?” 싶은 버번이다. 9년 숙성에 100 프루프, 이 스펙에 이 가격이면 버번 시장에서 가성비 끝판왕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잡하고 정교한 풍미를 기대하면 좀 실망할 수 있는데, 납 크릭의 매력은 거기에 있지 않다. 투박하고 직설적인 오크와 캐러멜, 묵직한 바디감 — 프리프로히비션 스타일 버번이 뭔지를 가장 합리적인 가격에 보여주는 병이다.

그리고 50도라는 도수가 개인적으로 매우 만족스럽다. 버번에서 도수는 곧 전투력이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40도짜리 버번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어딘가 밍밍하다. 고도수에 절여진 입맛으로 40도 버번을 마시면 풍미가 희석된 느낌이 지워지지 않거든. 그 점에서 납 크릭이 100 프루프를 고집하는 건 정말 잘한 선택이다. 도수가 받쳐주니까 오크와 캐러멜의 묵직함이 제대로 살아난다.

음용 방식은 니트를 기본으로 추천한다. 50%라서 도수 부담은 크지 않고, 물을 몇 방울 넣으면 견과류의 고소한 면이 잘 드러난다. 온더락도 나쁘지 않은데, 올드 패션드 칵테일로 만들면 진짜 좋다. 오크의 묵직함과 캐러멜의 단맛이 비터스와 잘 어울리거든. 버번 입문이 목적이라면 와일드 터키 101로 시작하되, 한 단계 올려서 숙성의 깊이를 경험하고 싶다면 납 크릭 9년이 좋은 선택이다. 같은 9년이라도 와일드 터키 12년의 복합적인 과일 풍미와는 방향이 다르니, 둘 다 마셔보고 취향을 찾아보는 것도 재밌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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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 Spe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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