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라 위스키를 좋아하면서도 매번 라프로익이나 라가불린만 사기엔 지갑이 좀 아프다. 그러다 트레이더스에서 눈에 띈 게 이 녹색 병이었다. 하트 브라더스(Hart Brothers) 피티드 아일라 싱글몰트. 700ml에 50도, 가격은 4만원대. 독립병입자(Independent Bottler)라는 말에 한 번, 가격에 한 번 놀랐다. 아일라 싱글몰트가 이 가격에? 일단 집어왔다.
독립병입자, 하트 브라더스
하트 브라더스는 1955년 글래스고에서 설립된 스코틀랜드의 독립병입자다. 독립병입이 뭔가 하면, 직접 위스키를 만드는 게 아니라 여러 증류소에서 캐스크를 사들여 자기들 기준으로 선별하고 병입해서 파는 회사를 말한다. 증류소 공식 보틀링과는 다른 시각으로 원액을 골라내기 때문에, 같은 증류소 위스키라도 색다른 캐릭터를 만날 수 있는 게 독립병입의 매력이다.
하트 브라더스는 특히 싱글 캐스크 보틀링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데, 이번에 리뷰하는 피티드 아일라는 좀 다른 결의 제품이다. 어떤 증류소의 원액인지 라벨에 명시하지 않고, “아일라(Islay)”라는 지역명만 표기했다. 아일라 섬의 어느 증류소에서 온 원액인지는 비밀인 셈이다. 이런 식의 라벨링은 독립병입 시장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증류소와의 계약 조건 때문이거나 여러 캐스크를 블렌딩했을 때 이렇게 처리하기도 한다.
50% ABV로 병입한 건 꽤 괜찮은 선택이다. 40%짜리 입문용 위스키들은 맛이 좀 밋밋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50%면 캐릭터가 확실히 살아있으면서도 니트로 마시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도수다.
테이스팅 노트

향 (Nose)
글라스에 따르자마자 피트 스모크가 올라온다. 근데 이게 라가불린 16년의 묵직한 스모크와는 좀 다르다. 코를 가까이 대면 라프로익에서 맡았던 그 특유의 병원 냄새가 꽤 그대로 느껴진다. 아일라 피트 위스키들 중에서도 메디시널한 쪽에 가까운 캐릭터인 거다. 피트 뒤로 레몬 껍질 같은 시트러스가 살짝 비치고, 바닷바람에서 오는 짭짤한 미네랄감이 배경에 깔린다. 시간을 좀 두면 바닐라와 허니 노트도 은근히 올라오는데, 피트가 워낙 전면에 있어서 집중해야 잡힌다.
맛 (Palate)
첫 모금에 피트의 스모키함이 혀를 감싼다. 50도답게 알코올의 온기가 확실히 느껴지는데, 거칠다기보다는 따뜻하게 퍼지는 쪽이다. 중반부터 흑후추 같은 스파이시함이 올라오고, 약간의 소금기가 바디에 깊이를 더한다. 달콤한 쪽으로는 캐러멜과 건과일이 조금 있는데, 셰리 캐스크 계열처럼 과일이 터지는 스타일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피트가 주인공이다. 전체적으로 미디엄 바디에 드라이한 성향이 강하다.
물을 몇 방울 넣으면 스모크가 한 발 물러나면서 숨어있던 몰트의 고소함과 시트러스가 좀 더 드러난다. 하이볼로 만들어도 피트가 탄산 위로 잘 살아남아서, 여름에 시원하게 마시기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니시 (Finish)
피니시는 중간에서 중상 정도 길이. 피트 스모크의 여운이 꽤 오래 남는다. 입 안에 이탄의 건조한 훈연감이 잔잔하게 머무르면서, 살짝 달콤한 몰트의 꼬리가 마지막에 스친다. 부나하벤 12년처럼 깔끔하게 끊기는 타입은 아니고, 아일라 피트 위스키답게 스모크가 여운으로 길게 이어진다. 이 여운이 다음 모금을 부르는 느낌.
마치며
4만원대에 아일라 싱글몰트 50도를 마실 수 있다는 건 솔직히 파격적이다. 물론 오피셜 보틀링들과 직접 비교하면 복합미에서 차이가 있긴 하다. 라가불린의 묵직한 깊이나, 아드벡의 폭발적인 캐릭터 같은 걸 기대하면 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 가격대에서 이 정도 피트 캐릭터와 도수를 갖춘 싱글몰트가 있다는 것 자체가 메리트다.
트레이더스에서 장 볼 때 하나 집어오기에 딱 좋은 위스키라고 본다. 하이볼 베이스로 써도 50도라 피트가 안 묻히고, 니트로 천천히 즐겨도 나쁘지 않다. 독립병입 위스키가 처음인 사람에게도 입문용으로 부담 없는 가격이고. 아일라 피트를 좋아하는데 일상적으로 마실 병이 필요하다면, 가격 대비 충분히 제 값을 하는 보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