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렌디드 위스키를 좀 무시하던 시절이 있었다. 싱글 몰트만 고급이고 블렌디드는 그냥 대중주라는 편견이랄까. 근데 듀어스 더블더블 21년을 마시고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다. 21년이라는 숙성 연수도 대단하지만, 4단계 숙성이라는 독특한 공정을 거친 이 위스키는 블렌디드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다. “블렌디드가 이 정도라고?” 라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왔다.
듀어스 브랜드 소개
듀어스(Dewar’s)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스카치 위스키 브랜드 중 하나다. 1846년, 존 듀어(John Dewar)가 스코틀랜드 퍼스(Perth)에서 설립했다. 처음에는 블렌디드 위스키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는데, 그의 아들 토미 듀어(Tommy Dewar)가 진짜 사업의 판을 키웠다. 토미는 1890년대에 2년간 세계일주를 하면서 26개국에 듀어스를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는데, 지금 기준으로 봐도 대단한 마케팅 감각이다.
듀어스의 핵심 증류소는 하이랜드 지역의 애버펠디(Aberfeldy)다. 1898년에 존 듀어의 아들들이 세운 증류소인데, 여기서 만드는 싱글 몰트가 듀어스 블렌디드 위스키의 심장 역할을 한다. 애버펠디 증류소가 있는 지역은 꿀로 유명한데, 실제로 애버펠디 싱글 몰트에서도 허니한 캐릭터가 두드러진다.
듀어스의 마스터 블렌더들은 대대로 “마리잉(marrying)”이라는 기술을 중시해왔다. 단순히 여러 원액을 섞는 게 아니라, 블렌딩 후 다시 통에 넣어서 원액들이 서로 어우러질 시간을 주는 것이다. 이 마리잉 과정이 듀어스 특유의 부드러운 질감의 비밀인데, 더블더블 시리즈에서는 이 개념을 극단까지 끌고 간다.
하이랜드 위스키의 특징
하이랜드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넓은 위스키 생산 지역이다. 워낙 면적이 넓다 보니 북부, 남부, 동부, 서부 하이랜드의 캐릭터가 다 다른데, 전반적으로 풀 바디에 로버스트한 스타일이 많다.
하이랜드 위스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은 꿀의 단맛, 헤더(히스) 꽃향, 그리고 몰트의 묵직한 바디감이다. 스페이사이드보다 좀 더 무게감이 있고, 아일라처럼 피트가 강하지는 않다. 애버펠디가 있는 남부 하이랜드는 비교적 부드럽고 허니한 캐릭터가 강한 편이다.
듀어스가 애버펠디를 키 몰트로 선택한 건 이런 이유가 있다. 하이랜드의 묵직한 바디감에 꿀 같은 단맛이 블렌디드 위스키의 중심축으로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른 지역의 몰트와 그레인 위스키를 블렌딩해서 복합성을 더하는 것이 듀어스의 방식이다.
이 위스키의 탄생 배경
“더블더블”이라는 이름은 듀어스의 마스터 블렌더 스테파니 맥클라우드(Stephanie Macleod)가 개발한 4단계 숙성 공정에서 나왔다. 블렌딩 두 번, 숙성 두 번 — 그래서 더블더블이다. 보통 블렌디드 위스키가 원액 섞고 바로 병입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이다.
과정을 풀어보면 이렇다. 먼저 각각의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를 따로 숙성시킨다. 그 다음 이것들을 블렌딩해서 통에 넣고 “마리잉” — 원액끼리 서로 익숙해질 시간을 준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 블렌딩된 위스키를 다시 한번 추가 숙성한 뒤, 마지막으로 특별히 선별된 캐스크에서 피니시까지 한다. 한마디로 공정이 꽤 번거롭다. 시간도 돈도 많이 드는 방식인데, 이걸 굳이 하는 이유가 있다.
21년이라는 숙성 연수는 프리미엄 싱글 몰트의 영역이다. 맥칼란 21년, 글렌피딕 21년 같은 위스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뜻인데, 블렌디드로 이 가격대에 도전한다는 건 상당한 자신감이 필요한 일이다. 스테파니 맥클라우드는 이 4단계 공정으로 싱글 몰트에 뒤지지 않는 복합성을 만들어내겠다는 의도였고, 결과물을 보면 그 의도가 꽤 잘 먹혔다고 생각한다.
듀어스 대표 라인업
듀어스의 라인업은 일반 라인과 더블더블 시리즈로 나뉜다.

듀어스 화이트 라벨 — 듀어스의 스탠다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듀어스 제품이고, 하이볼 베이스로 많이 쓰인다. 가볍고 스무스한 스타일.
듀어스 12년 — 블렌딩 후 오크통에서 마리잉 과정을 거친 제품. 화이트 라벨에서 한 단계 올라간 부드러움과 깊이를 보여준다.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은 라인업.
듀어스 15년 — 셰리 캐스크 숙성 원액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건과일의 풍미가 더해진다. 듀어스의 허니한 캐릭터와 셰리의 달콤함이 잘 어우러진 제품.
듀어스 18년 — 프리미엄 라인의 시작점. 꿀, 바닐라, 드라이 프루트의 밸런스가 훌륭하고, 블렌디드 스카치가 이 정도까지 복합적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병.
듀어스 25년 — 매우 소량만 생산되는 프리미엄 블렌디드. 긴 숙성에서 오는 깊은 오크의 영향과 풍부한 풍미가 특징이다.
더블더블 21년 — 오늘의 주인공. 4단계 숙성이라는 독특한 공정을 거친 제품으로, 듀어스의 블렌딩 철학이 집약된 라인업이다. “더블더블”이라는 이름은 블렌딩과 마리잉을 각각 두 번씩, 총 4단계를 거친다는 뜻이다.
더블더블 27년, 32년 — 21년과 같은 4단계 공정이지만 더 오래 숙성된 프리미엄 라인. 27년은 포우틸리 캐스크 피니시, 32년은 오크 크로스 캐스크 피니시 등 각각 다른 마무리 캐스크를 사용한다.
4단계 숙성 공정을 좀 더 설명하자면 이렇다. 1단계에서 몰트 위스키끼리 블렌딩하고, 2단계에서 그레인 위스키끼리 블렌딩한다. 3단계에서 이 둘을 합쳐서 마리잉시키고, 4단계에서 추가 캐스크에 넣어 피니시를 한다. 일반 블렌디드 위스키가 그냥 “섞고 끝”인 것에 비하면 공정이 상당히 복잡한데, 이 과정이 더블더블 시리즈의 독특한 부드러움과 복합성을 만들어낸다.
듀어스 더블더블 21년 테이스팅 노트
4단계 숙성이 만들어낸 블렌디드 스카치의 진수를 맛보자.

향 (Nose)
글라스에 따르면 꿀의 달콤한 향이 먼저 올라온다. 듀어스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허니한 캐릭터가 이 제품에서도 건재한데, 21년 숙성을 거치면서 훨씬 깊고 풍성해졌다. 토스트한 오크의 고소한 향이 그 위에 얹히고, 바닐라와 말린 살구의 달콤한 향이 뒤따른다. 아몬드 같은 견과류의 고소함도 느껴지고, 아주 미세한 스모키함이 배경에 깔려있다. 캐러멜의 따뜻한 달콤함도 있는데,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포근한” 향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린다. 21년이라는 시간이 만들어낸 깊이가 느껴지는 코.
맛 (Palate)
첫 모금에서 크리미한 질감이 확 느껴진다. 이게 4단계 숙성의 결과인 건지, 블렌디드 위스키 중에서도 이 정도 크리미한 텍스처는 흔치 않다. 허니컴의 달콤함이 입 안에 퍼지면서 구운 사과의 따뜻한 과일 맛이 올라온다. 시나몬과 토피의 스파이시하면서도 달콤한 풍미가 중반부를 채우고, 젠틀한 오크의 영향이 전체를 감싼다.
스무스하고 라운드한 질감이 이 위스키의 핵심인데, 모서리가 전혀 없다. 모든 풍미가 부드럽게 어우러져서 하나의 덩어리처럼 입 안에서 굴러간다. 블렌디드 위스키의 장점이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하는데, 싱글 몰트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이 매끄러운 일체감이 더블더블 21년에서는 극대화돼 있다. 솔직히 눈 감고 마시면 이게 블렌디드인지 싱글 몰트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을 정도다.
피니시 (Finish)
피니시가 길다. 따뜻한 여운이 가슴까지 내려가면서 꿀과 스파이스의 맛이 오래 남는다. 은근한 달콤함이 삼킨 후에도 수 분간 입 안에 머무는데, 서브틀한 스모크가 맨 마지막에 살짝 얼굴을 비친다. 21년 숙성답게 피니시에서 느껴지는 깊이감이 상당한데,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존재감이 확실한 피니시다. 한 잔 마시고 나면 한동안 아무것도 마시기 싫어지는, 그런 여운을 남기는 위스키.
마치며
듀어스 더블더블 21년은 블렌디드 위스키에 대한 편견을 깨주는 위스키다. “블렌디드는 싱글 몰트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있다면, 이 한 병이면 충분히 생각이 바뀔 수 있다. 4단계 숙성이라는 공정에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 것이 잔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가격대는 싱글 몰트 21년산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합리적인 편이다. 물론 싸다고 할 수는 없지만, 21년 숙성에 이 정도 완성도라면 나쁘지 않은 가격이라고 생각한다. 블렌디드 위스키의 가능성을 탐험해보고 싶은 분들에게, 혹은 싱글 몰트만 고집하다가 새로운 경험이 궁금한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병이다.
음용 방식은 니트가 가장 좋다. 이 위스키의 크리미한 질감과 복합적인 풍미는 니트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데, 물을 몇 방울 넣으면 꿀의 달콤함이 좀 더 열리기도 한다. 다만 하이볼은 비추. 이 가격대에 이 숙성 연수의 위스키를 탄산수로 희석하기엔 너무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