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렌디드 스카치에 대한 편견이 확 깨지는 병이 가끔 있다. 듀어스 12년이 딱 그런 케이스였는데, 가격대가 4~5만 원 선인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깔끔했다. 더블 에이징이라는 공법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싶었던 한 병.
듀어스 브랜드 소개
듀어스(Dewar’s)는 1846년 스코틀랜드 퍼스(Perth)에서 존 듀어(John Dewar)가 설립한 블렌디드 스카치 브랜드다. 존 듀어의 아들 토미 듀어(Tommy Dewar)가 2년에 걸쳐 26개국을 돌며 영업한 일화가 유명한데, 이 덕에 듀어스는 일찍이 글로벌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듀어스 블렌드의 심장은 하이랜드의 에버펠디(Aberfeldy) 증류소다. 1898년에 존 듀어의 아들들이 듀어스 블렌드에 들어갈 핵심 몰트를 직접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세운 곳인데, 에버펠디 싱글 몰트 특유의 허니한 캐릭터가 듀어스 전체 라인업의 맛을 결정짓는 핵심 원액 역할을 하고 있다.
블렌디드 스카치의 매력
블렌디드 스카치의 가장 큰 매력은 밸런스다. 싱글 몰트가 하나의 증류소 개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이라면, 블렌디드는 여러 증류소의 몰트와 그레인을 조합해서 누구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맛을 설계한다. 듀어스가 오래전부터 위스키 입문자들에게 추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튀는 요소 없이 깔끔하게 잘 다듬어진 맛이라 첫 잔으로 부담이 없다.
이 위스키의 탄생 배경
듀어스 12년의 정식 이름은 “The Ancestor”인데, 창립자 존 듀어에게 바치는 헌사라는 의미다. 에버펠디 싱글 몰트를 핵심 원액으로 삼고, 다른 몰트·그레인 위스키들과 블렌딩한 뒤 여기서 한 단계를 더 거친다.
바로 더블 에이징(Double Ageing) 공법인데, 블렌딩을 마친 위스키를 다시 오크 캐스크에 넣어 추가 숙성시키는 과정이다. 보통 블렌디드는 각각의 원액을 숙성시킨 후 섞어서 바로 병입하는데, 듀어스는 블렌딩 후에 한 번 더 캐스크에 돌려보내서 원액들이 서로 어우러질 시간을 준다. 이 과정 덕에 원액 간의 각이 부드럽게 녹아들고, 전체적으로 매끄러운 질감이 만들어진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섞은 다음에 다시 재운다”는 개념.
대표 라인업
듀어스는 입문용부터 울트라 프리미엄까지 꽤 넓은 라인업을 갖추고 있다.

화이트 라벨(White Label) — NAS(No Age Statement).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듀어스의 기본 라인. 하이볼 베이스로 많이 쓰인다.
8년 — 가볍고 부드러운 입문 라인. 가성비가 상당히 좋아서 데일리 위스키로 쓰기 괜찮다.
12년 (The Ancestor) — 오늘의 주인공. 더블 에이징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구간이라 듀어스의 맛을 제대로 경험하려면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맞다.
15년, 18년 (The Vintage) — 숙성 기간이 올라가면서 복합성과 깊이가 더해진다. 18년은 꽤 인상적인 수준.
25년, Double Double 시리즈 — 프리미엄 라인. Double Double은 4단계 숙성(Four-Stage Ageing)이라는 독특한 공법을 쓰는데, 46% 캐스크 스트렝스로 병입돼서 상당히 농밀한 맛이다.
테이스팅 노트
그럼 듀어스 12년을 한 잔 따라보겠다.

향 (Nose)
글라스에 코를 가져가면 꿀향이 가장 먼저 올라온다. 에버펠디 원액 특유의 허니한 캐릭터가 확실하게 느껴지는데, 그 위로 바닐라, 시리얼 몰트의 고소함이 겹겹이 쌓인다. 헤더 꽃의 은은한 플로럴함, 청사과의 가벼운 산뜻함도 있고, 코끝에 살짝 걸리는 라이트 스모크가 전체를 지루하지 않게 잡아준다. 공격적인 알코올 자극은 거의 없고, 전반적으로 편안한 향.
맛 (Palate)
입에 넣으면 부드럽다. 더블 에이징의 효과가 여기서 바로 느껴지는데, 원액들 사이에 각이 없고 하나로 매끄럽게 연결된 느낌이다. 크리미한 꿀, 토피의 달콤함이 혀 위를 먼저 감싸고, 오트 비스킷 같은 고소한 시리얼 터치가 이어진다. 중간에 젠틀한 시트러스가 스쳐가면서 산뜻하게 환기시켜주고, 가벼운 오크 스파이스가 뒤에서 존재감을 준다. 단맛과 고소함의 밸런스가 상당히 좋아서, 한 모금 한 모금이 편안하다.
피니시 (Finish)
미디엄 길이의 깔끔한 피니시. 꿀과 몰트의 달콤한 여운이 입 안에 남으면서, 은근한 온기가 목을 타고 내려간다. 소프트한 스모크가 마지막에 아주 살짝 얼굴을 비추고 조용히 사라지는 느낌. 무겁지 않고 깨끗하게 끝나는 편이라 다음 한 잔이 자연스럽게 당기는 타입이다.
마치며
듀어스 12년은 블렌디드 스카치의 가성비를 이야기할 때 빠지기 어려운 병이다. 4~5만 원대에서 이 정도의 부드러움과 완성도를 보여주는 위스키가 많지 않고, 더블 에이징이 주는 매끄러운 질감은 같은 가격대에서 확실히 차별화되는 포인트. 니트로 천천히 마셔도 좋고, 하이볼로 가볍게 즐겨도 꿀과 토피의 달콤함이 잘 살아서 어떤 방식이든 실패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