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를 마시면서 “이 증류소는 진짜 장인 정신이 살아있구나” 하고 느낀 적이 몇 번 있는데, 발베니가 그중 하나다. 전통 플로어 몰팅을 아직도 직접 하고, 자체 쿠퍼리지(통 제작소)까지 운영하는 증류소라니. 거기에 캐스크 피니싱이라는 기법을 스카치 위스키 업계에서 최초로 도입한 곳이기도 하다. 발베니 12년 더블우드는 그 캐스크 피니싱의 시작점이 된 병인데, 한 모금 마시면 왜 이 기법이 업계 전체로 퍼져나갔는지 바로 이해가 간다.
발베니 증류소, 장인 정신의 결정체
발베니(The Balvenie)는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 더프타운(Dufftown)에 위치한 증류소다. 더프타운은 “위스키의 수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증류소가 밀집한 곳인데, 발베니는 그 유명한 글렌피딕(Glenfiddich) 바로 옆에 있다. 둘 다 윌리엄 그랜트(William Grant)가 세운 증류소라 형제 관계인 셈.
윌리엄 그랜트가 글렌피딕을 1887년에 세운 뒤, 5년 후인 1892년에 바로 옆 건물에 발베니를 설립했다. 같은 사람이 만들었고 바로 옆에 붙어있지만, 두 증류소의 캐릭터는 상당히 다르다. 글렌피딕이 가볍고 프루티한 스타일이라면, 발베니는 좀 더 꿀 같은 달콤함과 묵직한 바디감을 갖고 있다. 같은 물을 쓰고 같은 기후에서 숙성하는데도 이렇게 다른 맛이 나온다는 게 위스키의 신비로운 점이다.
발베니가 다른 증류소와 차별화되는 가장 큰 포인트는 세 가지다. 첫째, 자체 플로어 몰팅. 대부분의 증류소가 외부 몰팅 업체에서 보리를 가공해 들여오는 반면, 발베니는 아직도 직접 보리를 펴 놓고 삽으로 뒤집으며 전통 방식으로 몰팅을 한다. 전체 사용량의 일부에 불과하긴 하지만, 이 전통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증류소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봐야 한다.
둘째, 자체 쿠퍼리지. 오크통을 직접 만들고 수리하는 시설을 증류소 안에 보유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이런 곳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데, 캐스크의 상태가 위스키 품질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이건 상당한 투자이자 장인 정신의 증거다.
셋째, 몰트 마스터 데이비드 스튜어트(David Stewart MBE). 1962년부터 발베니에서 일한 이 분은 스코틀랜드 위스키 업계에서 가장 오래 재직 중인 몰트 마스터인데, 1993년에 캐스크 피니싱이라는 기법을 스카치 위스키에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버번 캐스크에서 숙성한 위스키를 셰리 캐스크로 옮겨 추가 숙성하는 이 기법이 바로 더블우드의 시작이었고, 이후 업계 전체로 퍼져 지금은 거의 표준이 된 셈이다.
스페이사이드, 발베니 스타일
스페이사이드 위스키 하면 우아하고 프루티한 맛을 떠올리기 쉬운데, 발베니는 거기에 꿀의 달콤함과 바닐라의 크리미함을 더한 스타일이다. 피트를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 스모키함은 없고, 대신 캐스크에서 오는 풍미에 집중한다. 이 점이 같은 스페이사이드라도 글렌피딕의 가벼운 과일향이나 맥캘란의 진한 셰리향과는 또 다른 포지션을 만들어내는 거다.
발베니 특유의 “꿀 같은(honeyed)” 캐릭터는 어디서 오는 걸까. 발베니가 직접 키운 보리에서 오는 부분도 있고, 증류소 특유의 긴 발효 시간도 한몫한다. 여기에 캐스크의 영향이 합쳐지면서 발베니만의 시그니처 맛이 완성되는 건데, 이 일관된 캐릭터를 수십 년간 유지해온 것 자체가 데이비드 스튜어트의 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위스키의 탄생 배경
1993년, 몰트 마스터 데이비드 스튜어트가 하나의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겼다. 아메리칸 오크 버번 배럴에서 충분히 숙성한 위스키를 유러피안 오크 올로로소 셰리 캐스크로 옮겨서 한 번 더 숙성시키면 어떨까. 지금은 “캐스크 피니싱”이라 불리며 업계 전체가 쓰는 기법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걸 체계적으로 시도한 사람이 없었다. 더블우드는 그 최초의 결과물이다.
스튜어트는 1962년부터 발베니에서 일해온 사람이다. 30년 넘게 캐스크를 다루면서 쌓인 감각이 이 아이디어의 밑바탕이었을 거다. 버번 캐스크가 주는 바닐라와 꿀의 달콤함 위에, 셰리 캐스크의 과일향과 스파이스를 한 겹 더 얹는 구조. “더블우드”라는 이름이 두 종류의 오크를 거친다는 뜻인데, 이름 그 자체가 이 위스키의 제조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이후 글렌모렌지의 라산타, 글렌피딕 14년 등 수많은 증류소가 캐스크 피니싱을 도입했지만, 원조는 발베니 더블우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스튜어트는 지금까지도 발베니의 몰트 마스터로 현역에서 활동 중인데, 업계에서 가장 오래 재직한 몰트 마스터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다. 한 사람이 60년 넘게 한 증류소에서 일하면서 업계의 흐름 자체를 바꾼 셈이니, 더블우드 한 병에 담긴 무게가 가볍지 않다.
발베니 대표 라인업
발베니의 라인업은 대부분 캐스크 피니싱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데이비드 스튜어트의 철학이 그대로 반영된 구성.

12년 더블우드 — 오늘의 주인공이자 발베니의 간판. 아메리칸 오크 버번 배럴에서 1차 숙성한 후, 유러피안 오크 올로로소 셰리 캐스크에서 추가 숙성을 거친다. 캐스크 피니싱의 원조다운 교과서적인 완성도를 보여주는 병.
14년 캐리비안 캐스크 — 버번 캐스크에서 숙성한 후 카리브해 럼 캐스크에서 피니싱한 제품. 트로피컬한 달콤함이 발베니의 꿀 캐릭터와 만나면서 독특한 맛을 만들어낸다. 개인적으로 발베니 라인업 중 가장 재미있는 병이라고 생각한다.
17년 더블우드 — 12년 더블우드의 직접적인 업그레이드 버전. 5년의 추가 숙성이 주는 깊이감이 확실히 있다.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은 편.
21년 포트우드 — 버번 캐스크에서 숙성 후 포트 와인 캐스크에서 피니싱한 제품. 포트 와인의 진한 베리 풍미가 발베니의 꿀 캐릭터와 합쳐지면서 상당히 럭셔리한 맛이 난다.
25년 싱글배럴 — 말 그대로 단일 배럴에서 뽑은 한정판. 배럴 번호가 병에 기재되어 있고, 배치마다 맛이 다르다. 발베니의 최상위 라인 중 하나.
이 밖에도 30년, 40년, 50년 같은 초고숙성 라인이 있긴 한데, 이쪽은 컬렉터 영역이라 마시기보다는 소장하는 느낌에 가깝다.
발베니 12년 더블우드 테이스팅 노트
그럼 캐스크 피니싱의 원점, 발베니 12년 더블우드를 마셔보자.

향 (Nose)
글라스에 따르자마자 꿀 향이 코를 감싼다. 발베니 하면 떠오르는 그 시그니처 허니 캐릭터가 첫 순간부터 확실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닐라의 크리미한 단향이 뒤를 따르고, 달콤한 과일향이 은은하게 깔린다. 올로로소 셰리의 영향인 시나몬, 넛맥 같은 스파이스 향도 고개를 내미는데, 이게 꿀과 바닐라의 달콤함 사이에서 좋은 악센트가 된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초대하는 듯한 향 프로파일인데, 코를 대는 순간 “이거 맛있겠다”는 기대감이 바로 드는 종류의 향이다.
맛 (Palate)
입에 넣으면 부드럽고 멜로우한 질감이 먼저 느껴진다. 실키하다고 해야 할까, 혀 위에서 미끄러지듯 퍼지는 느낌이 좋다. 꿀과 바닐라의 달콤함이 중심을 잡고, 셰리의 달콤한 과일 맛이 겹쳐진다. 시트러스의 살짝 새콤한 면이 단맛 사이에서 밸런스를 잡아주고, 오키 스파이스가 뒤에서 은근한 깊이를 더해준다. 버번 캐스크에서 온 바닐라와 셰리 캐스크에서 온 과일향이 하나로 녹아있는 맛인데, 이 두 캐스크의 조합이 “더블우드”라는 이름의 의미를 입으로 설명해주는 느낌이다. 40%라는 도수가 좀 더 높았으면 싶은 아쉬움이 살짝 있지만, 이 부드러운 질감 자체는 40%이기에 가능한 부분도 있으니 트레이드오프라고 봐야 할 듯.
피니시 (Finish)
미디엄 길이의 피니시. 따뜻한 여운과 함께 시나몬 스파이스가 입 안에서 은근하게 맴돈다. 젠틀한 오크의 뒤맛이 깔끔하게 정리해주면서, 달콤한 여운이 마지막까지 남는다. 깨끗한 마무리가 인상적인데, 너무 빨리 사라지지도 않고 너무 오래 질질 끌지도 않는 적절한 길이다. 다음 한 모금을 편안하게 이어갈 수 있는 종류의 피니시.
마치며
발베니 12년 더블우드는 “위스키 입문자에게 뭘 추천할까?” 하는 질문에 자주 등장하는 병인데, 그 이유가 있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복합적이면서도 어려운 맛이 없다. 위스키를 처음 마시는 사람도 한 모금에 “이거 맛있다”고 느낄 수 있는 접근성이 가장 큰 매력이다.
동시에 캐스크 피니싱의 원조라는 역사적 의미도 있어서, 위스키를 좀 마셔본 사람이 다시 돌아와서 마셔도 새삼 감탄하게 되는 면이 있다. 버번 캐스크와 셰리 캐스크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풍미의 레이어를 알고 나서 다시 마시면, 처음 마실 때와는 또 다른 걸 발견하게 되니까.
음용 방식은 역시 니트가 기본. 물을 몇 방울 넣으면 꿀의 달콤함이 좀 더 열리는 느낌이 있어서 그것도 괜찮다. 하이볼로 만들어도 발베니의 달콤한 캐릭터가 탄산수와 잘 어울리는데, 12년짜리를 하이볼로 쓰기엔 좀 아까운 감이 있으니 그건 각자의 선택에 맡기겠다. 어떤 방식으로든 한 병 열어두면 금방 비워지는 타입의 위스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