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리 캐스크 위스키를 고를 때 보통 떠올리는 이름들이 있다. 맥캘란, 글렌드로낙, 아벨라워 아부나흐. 그런데 이 라인업에 슬쩍 끼어들어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병이 하나 있다. 아란(Arran) 셰리 캐스크. 별명은 “더 보데가(The Bodega)”. 퍼스트 필 올로로소 셰리 호그스헤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숙성하고, 캐스크 스트렝스 55.8%로 병입한 녀석이다. 논칠필터드에 무착색. 꾸밈없이 통에서 꺼낸 그대로를 담았다.
아란 증류소와 로크란자
아란(Arran) 증류소는 스코틀랜드 서쪽 아란 섬 북단, 로크란자(Lochranza)에 있다. 1995년에 설립됐으니 스코틀랜드 증류소 중에서는 꽤 젊은 편이다. 설립자 해롤드 커리(Harold Currie)가 아란 섬에서 150여 년 만에 위스키 증류를 부활시키겠다는 목표로 세운 곳인데, 지금은 아란 섬 남단에 피티드 위스키 전담 증류소인 래그(Lagg)까지 열어서 두 개의 증류소를 운영하고 있다.
아란 섬은 “스코틀랜드의 축소판”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지형을 품고 있는데, 로크란자 쪽은 산에서 내려오는 연수(soft water)를 쓴다. 이 물이 아란 위스키 특유의 가볍고 깔끔한 스피릿 캐릭터를 만드는 데 한몫한다. 아일랜드(Islands) 위스키 중에서도 아란은 유독 밝고 과일향이 풍부한 스타일로, 하이랜드와 스페이사이드 사이 어딘가에 있는 듯한 개성이 있다.
이 위스키의 탄생 배경
“더 보데가”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가 있다. 보데가는 스페인어로 셰리 와인을 숙성하는 저장고를 뜻하는데, 이 위스키가 스페인 헤레스(Jerez)산 퍼스트 필 올로로소 셰리 호그스헤드만으로 전량 숙성됐기 때문이다. 피니싱이 아니라 풀 매추레이션이라는 점이 핵심. 셰리 캐스크에 잠깐 담갔다 뺀 게 아니라 처음부터 셰리 통에서만 자란 원액이다.
캐스크 선택도 흥미로운데, 유러피안 오크가 아니라 아메리칸 오크 호그스헤드를 골랐다. 아란 스피릿 자체가 가볍고 과일향이 강한 편이라, 유러피안 오크의 묵직한 탄닌보다는 아메리칸 오크의 바닐라와 캐러멜 뉘앙스가 더 잘 어울린다는 판단이었을 거다. 결과적으로 셰리의 진한 건과일 풍미와 아란 특유의 밝은 과일 캐릭터가 꽤 자연스럽게 섞인다.
테이스팅 노트

향 (Nose)
글라스에 따르면 색부터 인상적이다. 짙은 호박색. 무착색이라는 걸 생각하면 셰리 캐스크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알 수 있다. 향을 맡으면 건무화과와 건크랜베리가 먼저 올라오고, 그 뒤로 오렌지 필의 시트러스함이 따라온다. 꿀과 브라운슈거의 달콤한 층이 깔려있고, 시나몬과 생강의 따뜻한 스파이스가 코끝을 톡톡 건드린다. 55.8%인데 알코올 자극이 생각보다 순하다. 논칠필터드 특유의 풍성한 아로마가 잘 살아있는 편.
맛 (Palate)
첫 모금에서 말린 자두와 건포도의 진한 단맛이 치고 들어온다. 그런데 아부나흐처럼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스타일은 아니다. 셰리의 건과일 풍미 사이로 아란 스피릿 특유의 밝은 과일감이 비치는 게 이 위스키만의 매력이다. 다크 초콜릿, 넛맥, 약간의 후추 스파이스가 중반부에 올라오고, 바디는 생각보다 두텁다. 점성이 있는 오일리한 질감이 입안을 감싸는 느낌.
물을 살짝 넣으면 감귤류 노트가 더 선명해지면서 초콜릿 오렌지 같은 뉘앙스가 나타난다. 니트로 한 모금, 물 넣고 한 모금 번갈아 마시면 같은 위스키에서 두 가지 표정을 볼 수 있다.
피니시 (Finish)
중간에서 긴 편. 클로브와 진저의 베이킹 스파이스가 따뜻하게 남고, 비터스위트한 다크 초콜릿 여운이 천천히 사라진다. 셰리 캐스크 위스키 치고는 탄닌이 세지 않아서 뒷맛이 깔끔한 편이다. 끝자락에 미세한 소금기 같은 미네랄 느낌이 스치는데, 이게 아란 섬 해양 환경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인상적이다.
아란 증류소 대표 라인업
아란의 코어 레인지는 연수 표기 라인(10년, 14년, 18년)과 캐스크 시리즈로 나뉜다. 아란 10년이 입문용으로 가장 무난하고, 아란 쿼터 캐스크 “더 보시(The Bothy)”는 소형 캐스크로 가속 숙성시킨 NAS 제품이다. 이번에 리뷰한 셰리 캐스크 “더 보데가”와 함께 캐스크 시리즈를 구성한다. 남단 래그 증류소에서는 피티드 라인을 따로 만들고 있어서, 아란 섬 하나에서 논피트와 피트 양쪽을 모두 커버하는 셈이다.
마치며
아란 셰리 캐스크는 셰리 캐스크 스트렝스 중에서 의외로 밝고 과일 향이 살아있는 위스키다. 글렌알라키 10년 CS나 아부나흐가 묵직한 셰리의 정면 승부라면, 아란은 셰리의 진한 맛 위에 자기만의 밝은 과일 캐릭터를 얹어서 좀 다른 결의 매력을 보여준다. 가격대도 셰리 CS 카테고리에서 합리적인 편이라, 셰리 캐스크 라인업을 넓히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할 만하다. 글렌파클라스 15년이나 부나하벤 12년 같은 셰리 계열 위스키와 나란히 놓고 비교해봐도 재밌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