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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라워 아부나흐 배치 84 리뷰 — 셰리 캐스크의 정수

Hyouk Seo Hyouk Seo Mar 20, 2026 · 5 mins read
아벨라워 아부나흐 배치 84 리뷰 — 셰리 캐스크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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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크 스트렝스(Cask Strength) 위스키의 세계에 한 발 들여놓으면 다시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통에서 꺼낸 그대로의 도수, 물이나 여과 과정 없이 위스키 원액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경험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캐스크 스트렝스 위스키 중에서도 아벨라워 아부나흐(Aberlour A’bunadh)는 좀 특별한 위치에 있다. 올로로소 셰리 버트만으로 숙성한 캐스크 스트렝스. 처음 한 모금 머금는 순간 입 안에서 셰리 폭탄이 터진다. 진짜 이런 게 셰리 캐스크의 정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병이다.

아벨라워 증류소 소개

아벨라워(Aberlour) 증류소는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 한가운데, 아벨라워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1879년 제임스 플레밍(James Fleming)이 설립했는데, 플레밍은 원래 이 지역 곡물상이었다. 당시 스페이사이드에 위스키 붐이 불면서 “직접 만들어보자”는 결심을 했다고. 증류소 부지를 고를 때 기준이 재밌는데, 좋은 물이 나오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벤 리네스(Ben Rinnes)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지었다고 한다.

플레밍이 특히 심혈을 기울인 건 셰리 캐스크 숙성이었다. 1800년대 후반은 셰리 캐스크가 스코틀랜드에 풍부하게 공급되던 시기였는데, 아벨라워는 그때부터 셰리 캐스크에 대한 노하우를 쌓기 시작했다. 이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아벨라워 라인업 전반에 셰리 캐스크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특히 아부나흐(A’bunadh)는 그 셰리 전통의 정점에 있는 보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부나흐(A’bunadh)는 게일어로 “근원(The Original)”이라는 뜻이다. 100년 전 아벨라워에서 만들던 위스키를 재현하겠다는 의도로 탄생한 시리즈인데, 올로로소 셰리 버트(Butt)만을 사용해서 숙성하고, 캐스크 스트렝스로 병입하며, 연령 표기(Age Statement) 없이 배치 넘버만 붙여서 출시한다. 각 배치마다 사용되는 캐스크의 조합과 원액의 숙성 연수가 다르기 때문에, 배치별로 미묘한 차이가 생기는 것도 아부나흐의 재미다. 이번에 리뷰하는 건 배치 84.

스페이사이드의 셰리 전통

스페이사이드는 스코틀랜드 위스키의 심장부라 불리는 지역이다. 50개 이상의 증류소가 밀집해 있고,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과일 향이 풍부한 스타일이 주류다. 그 중에서도 아벨라워처럼 셰리 캐스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증류소들은 건과일, 견과류, 초콜릿 같은 풍부한 풍미로 팬층이 두텁다.

아벨라워가 셰리 캐스크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 중 하나는, 단순히 셰리 캐스크를 “쓰는” 수준이 아니라 “올로로소 셰리 버트만”으로 숙성하는 과감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보통 셰리 캐스크를 사용하는 증류소들도 버번 캐스크를 병행하거나, PX(페드로 히메네스)와 올로로소를 섞는 경우가 많은데, 아부나흐는 올로로소 셰리 버트 올인이다. 이런 극단적인 셰리 숙성이 아부나흐만의 압도적인 진한 풍미를 만들어낸다.

이 위스키의 탄생 배경

아부나흐(A’bunadh)라는 이름은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근원” 또는 “원래의 것”이라는 뜻이다. 이름부터가 이 위스키의 기획 의도를 말해주고 있다. 2000년 전후로 출시된 이 시리즈는, 1879년 설립자 제임스 플레밍이 처음 만들었던 아벨라워 위스키를 재현하겠다는 목표로 기획됐다. 빅토리아 시대의 위스키 스타일을 21세기에 되살리겠다는 꽤 낭만적인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그래서 조건이 까다롭다. 스페인 헤레스(Jerez)산 퍼스트 필 올로로소 셰리 버트만 사용하고, 캐스크 스트렝스로 병입하되 냉각 여과도, 인공 착색도 하지 않는다. 통에서 꺼낸 그대로의 색, 그대로의 도수, 그대로의 맛. 위스키에 인위적인 손을 대지 않겠다는 고집이 담겨 있는 거다. 배치 84는 약 61% ABV로 나왔는데, 배치마다 선택되는 캐스크가 다르기 때문에 도수도, 맛의 뉘앙스도 매번 조금씩 달라진다.

이 배치 넘버 시스템 자체가 아부나흐의 또 다른 재미를 만든다. “배치 78은 셰리가 더 강했는데 81은 스파이시했다”라는 식으로 비교하는 게 마니아들 사이에서 하나의 놀이 문화가 됐다. 같은 이름의 위스키인데 매번 다른 표정을 보여주니, 수집하고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아부나흐가 출시 이후 꾸준히 팬층을 넓혀온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배치 간 변주에 있다고 본다.

아벨라워 대표 라인업

아벨라워의 라인업은 더블 캐스크 시리즈와 아부나흐, 두 축으로 구성된다.

아벨라워 대표 라인업 비교

아벨라워 12년 더블 캐스크 — 아벨라워 입문으로 가장 많이 추천되는 보틀. 셰리 캐스크와 버번 캐스크에서 각각 숙성한 원액을 블렌딩한 스타일이다. 밸런스가 좋고 무난한데, 40% 도수가 좀 아쉬운 부분이다.

아벨라워 12년 논칠필터드(Un-chillfiltered) — 같은 12년이지만 48%로 도수를 높이고 비냉각 여과를 적용한 버전. 12년 더블 캐스크보다 셰리의 캐릭터가 훨씬 풍부하게 느껴진다. 가격 차이가 크지 않으니 가능하면 이쪽을 추천한다.

아벨라워 16년 더블 캐스크 — 16년 숙성으로 더 깊고 복합적인 풍미를 보여준다. 건과일, 스파이스, 다크 초콜릿 노트가 발전해 있고, 숙성의 깊이가 확실히 다르다. 다만 이 가격대에 경쟁자가 많아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위치다.

아벨라워 18년 — 오랜 셰리 숙성의 결과물. 묵직하고 복합적인 풍미가 인상적인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특별한 날 한 잔 하기에 좋은 보틀.

아부나흐(A’bunadh) — 아벨라워의 시그니처이자 이번 리뷰의 주인공. 올로로소 셰리 버트 숙성, NAS, 캐스크 스트렝스. 배치마다 도수가 다르고, 이번 배치 84는 약 61% ABV로 출시됐다. 셰리 캐스크 매니아라면 반드시 한 번은 거쳐가야 할 병이라고 생각한다.

아부나흐 배치 84 테이스팅 노트

자, 이제 진짜로 글라스를 들어보자. 배치 84, 약 61% ABV.

아벨라워 아부나흐 배치 84

향 (Nose)

글라스에 코를 가져다 대면 압도적인 셰리의 향이 밀려온다.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데, 건과일이 잔뜩 들어간 그 진한 케이크 말이다. 다크 초콜릿, 체리, 오렌지 필의 시트러스함이 뒤를 따르고, 시나몬과 정향(clove)의 따뜻한 스파이스가 코끝을 자극한다. 61%라는 도수가 무색할 정도로 알코올의 자극이 의외로 크지 않다. 물론 도수가 도수이니 세게 들이마시면 알코올이 확 올라오긴 하는데,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맡으면 셰리의 진한 달콤함이 정말 풍성하게 펼쳐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올로로소 셰리 특유의 약간 건조한 견과류 향도 올라오는 게 좋다.

맛 (Palate)

첫 모금의 임팩트가 장난이 아니다. 입 안에서 다크 프루트가 폭발한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강렬하다. 무화과 잼, 에스프레소, 진저브레드의 풍미가 동시에 밀려오면서, 점성이 높은 묵직한 바디감이 입 안을 꽉 채운다. 갈색 설탕의 달콤함이 깊게 깔려있고, 가죽 같은 뉘앙스도 은은하게 스친다.

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면 성격이 좀 바뀌는데, 강렬함이 약간 누그러지면서 오렌지, 건포도 같은 과일 노트가 더 선명하게 올라온다. 개인적으로 아부나흐는 니트로 한 모금, 물을 넣고 한 모금, 이렇게 번갈아 가며 마시는 걸 좋아한다. 같은 위스키인데 두 가지 다른 표정을 보여주거든.

피니시 (Finish)

피니시가 정말 길다. 따뜻한 여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몇 분이고 남아있다. 건과일의 단맛과 비터스위트 초콜릿의 씁쓸달콤함이 겹겹이 겹쳐지고, 오크 스파이스의 향신료 느낌이 뒤에서 잡아준다. 셰리의 온기가 위장까지 전해지는 느낌이 있는데, 겨울에 마시면 이 따뜻한 피니시가 정말 좋다. 캐스크 스트렝스답게 여운의 강도와 지속 시간 모두 인상적이다.

마치며

아부나흐 배치 84는 셰리 캐스크 위스키의 교과서 같은 보틀이다. 올로로소 셰리 버트만으로 이런 풍미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게 대단하고, 캐스크 스트렝스임에도 불구하고 알코올의 거친 면이 비교적 잘 다듬어져 있다. 물론 61%라는 도수가 부담될 수 있지만, 물을 조금씩 넣어가면서 자기만의 도수를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아부나흐를 마시는 또 다른 재미다.

셰리 캐스크 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부나흐는 거의 필수 경유지라고 생각한다. 글렌드로낙, 맥칼란 같은 셰리 캐스크 강호들과 비교 테이스팅해봐도 재밌고, 배치 넘버가 다른 아부나흐끼리 비교하는 것도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꽤 인기 있는 놀이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면, 아부나흐의 맛에 익숙해지면 40%짜리 셰리 캐스크 위스키가 좀 싱겁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거다. 이게 캐스크 스트렝스의 함정인데, 한 번 이 강도에 적응하면 돌아가기가 좀 힘들더라.

Hyouk Seo

Written by ✍️ Hyouk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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